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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은이니까,,

제가 성인 ADHD 라구요? 우울증인 줄 알았는데.

by 능이버섯 2022.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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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과 친척들이 기억하는 나는 덜렁거려서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뭐든 깜빡깜빢 잘 잊어버리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엄청난 집중력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당시의 나는 책을 너무 좋아해서 길 바닥에 앉아서 읽고 있던 적이 너무 많아서 동네 어른들이 집에 데려다 준 적도 있을 정도였고 좋아하는 책(먼 나라 이웃 나라를 좋아했다고 함) 내용을 달달 외우고 다녀서 집에 손님이 오면 우리 딸이 얼마나 똑똑한 줄 아냐며 자랑거리가 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특출나게 잘하지도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나는 항상 딴 생각으로 가득했고 공부든 뭐든 열심히 한 적이 없었다. 항상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정말 더 이상 미루면 큰일난다 싶을 때 억지로 하거나 포기했다. 뭐든 최선을 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명이 많았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타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성인이 된 후의 나는 이런 내가 싫어서 화가 많았고 까칠했고 사람과 어울리는 게 싫었고 우울했다. 초중고 내내 지각 조퇴 결석 한 번 없이 12년 개근으로 개근상을 받았던 나는 대학교에 진학하며 과도한 자유가 주어지자 학교에 잘 나가지 않았고 공부도 안 했고 대충 살았다. 그래서 학사경고를 받은 적도 있는데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있다. 아직도 모르실 것이다.

나는 항상 내가 우울증이라고 생각했지만 전문가에게 진단 받지 않은 셀프 진단은 안 된다는 생각에 정신의학과를 찾아가기로 했다. 검사 결과 예상한대로 우울증이라는 진단과 함께 약물 치료와 상담을 병행했다.

우울증 약이 나한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처방 받을 때도 전문의랑 요즘 어때요 잘 지내시죠? 2주 치 드릴게요. 1분 정도 간단한 대화 후 처방전을 받으면 끝났고 임상심리사 선생님이랑 50분 정도 대화하는 게 정말 큰 도움이 됐다.

당시에는 집이나 회사 근처에 병원이 없어서 꽤 멀리까지 지하철이나 택시를 타고 다녀야했지만 나는 전문가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 먼 병원을 열심히 다녔다.

그렇게 1년 정도 치료를 받으니 확실히 덜 우울했고 만사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포인트도 조금 다듬어져서 병원에서 이제 그만 상담 받아도 될 것 같다고 했고 나는 병원을 다니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뭐라고 할까 근본적인 무언가가 해결되었다는 기분은 그 때도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울감과는 다른 무기력함과 최근 들어 더 심해진 건망증, 회사 일 하다가 쌓인 스트레스로 인해 생긴 화병 때문에 병원을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는 회사 앞에 병원이 생겨서 병원을 옮기게 되었는데 (병원은 무조건 가까운 게 최고임) 마침 이 병원에는 방송 출연 많이 했다는 유명한 의사선생님이 계시다는 홍보기사가 있었다. 나는 은근히 그 분이 봐주시길 기대했지만 다른 선생님께 상담 받게 되어서 조금 실망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또 다시 우울증 진단을 받고 꾸준히 약을 처방받아서 먹었다.

이번에는 이전 병원처럼 임상심리사를 통한 상담은 없었지만 짧게는 5분, 길게는 20분 이상 선생님이랑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며 밀도있는 상담을 했다. 하지만 전혀 나아지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공허하고 무기력하고 건망증이 심했다. 그냥 무기력함으로 인해 발생한 우울감이 조금 가라앉았을 뿐이다.

이게 맞는 건가 다시 상담을 받으러 다녀야 되나 고민이 되던 어느 날, 그 선생님은 다른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며 다음 진료부터는 다른 선생님이 맡게 될 거라고 하셨다.

살면서 병원을 많이 다녀봤지만... 의사가 이직하는 건 처음 봐서 조금 신기하기도 했고 나는 또 다시 은근히 그 스타선생님이 봐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스타선생님이 아닌 다른 선생님이 나를 담당하게 되었고 내심 실망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처음 만난 날 몇 마디 대화를 나누어보더니 갑자기 무슨 검사지를 꺼내어 주셨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내가 우울증이 아닌 거 같은데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라고 했다.

자주 깜빡한다 자주 미룬다 이런 문항들에 체크하는 거였는데 인터넷에 자가검사표가 아마 있었던 것 같다. 다들 이런 거 아니야? 갸웃갸웃 하면서 체크해서 넘겼더니 선생님 표정이 조금 심각해지면서 방금 한 건 ADHD 진단 테스트라인데 아무래도 ADHD가 강하게 의심된다고 했다. 검사를 받아보겠냐고 했다.

검사하는데 시간도 한두시간 들고 비용도 20인가 든다고 했는데.. 어째 정확하게 기억하는 게 없네... 아무튼 나는 살면서 내가 ADHD라는 생각은 1도 해본 적이 없어서 선생님이 오진하셨을 거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있었고 검사를 받고 나면 정확한 내 병명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컴퓨터로 하는 테스트였는데 ㅇㅇㅇ한 것을 최대한 빨리 고르시오 하는 문제들이 계쏙 나오는데 집중력이나 인지력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테스트라고 했던 것 같지만 나는 기억력 테스트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정말 아주 지루한 검사였다.. 나는 건망증이 심한 거지 ADHD가 아닌데... 근데 지능이 낮게 나오면 어떡하지... 그런 잡생각을 하며 검사에 임했고 나는 아주 저조한 수치가 나왔고 성인 ADHD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평소에 나는 폭식을 하거나 충동구매를 하거나 기분 변화가 변덕스럽게 일어나거나 등등 충동적인 부분이 꽤 많았는데 이 또한 ADHD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어릴 때 일화들을 얘기할 때마다 전형적인 ADHD 증상이라는 말씀을 해주셨고 아마도 내가 조용한 ADHD라서 아마 다들 모르고 넘어갔을 거라고 한다.

과격한 행동을 하거나 학업 성취도가 눈에 띄게 낮았다면 아마 부모님도 뭔가 이상한 걸 느끼셨을 텐데 나는 책을 좋아했고 공부도 애매하게 잘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는데 고등학교 입학 시 성적우수자로 분류되어 3년 장학생이 되었다. 덧붙이자면 공부를 하도 안 해서 1년 만에 짤렸다.

 

ADHD의 특징으로 인해 자신감을 잃고 자존감이 낮아지고 그것 때문에 우울감이 올 수 있다고 했다. 보통 ADHD들이 그렇다고 했다. 나도 잘 까먹고 산만하고 충동적이고 뭐 하나를 시작해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합병증이라고 할 수 있는 우울증만으로 치료를 받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좋아지는 걸 못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내가 먹는 약 종류가 많아서 하나하나가 무슨 약인지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아침 저녁으로 꽤 약을 많이 먹는다. 아침에는 콘서타랑 그 외 다른 증상 호전에 도움을 주는 약을 먹고 있는데, 콘서타 부작용으로 잠을 깊게 못 자서 자기 전에는 잠을 잘 자게 도와주는 약을 먹고 있다.

 

확실히 ADHD 진단 후 약물치료를 받으니 우울증약만 먹을 때랑은 다르게 조금 호전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집중이 뽝!!!! 되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예전에 비해 꽤 계획도 잘 세우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일도 조금 줄었고 충동적으로 돈을 쓰는 일이 특히 많이 줄었다. 거의 1년 넘게 좋아지고 있어요 괜찮네요 약은 동일하게 처방할게요 하는 얘기를 들었다.

생전 뭘 열심히 해봐야지!!! 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는데 약 기운 때문인지 작년 말부터 올해 초부터는 뭔가 이것저것 많이 하고 싶어졌다.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그러고 싶었다. 그래서 계획을 엄청 많이 세워서 열심히 했는데 3달 지나가니까 의욕이 사라져가고 다시 공허해지기 시작했다.

어제는 정기적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요즘은 어떠냐고 물어보시길래 그냥 마음이 허둥허둥하고 조급하고 그렇다. 뭘 열심히 하고 싶지가 않다. 오늘 운전면허 학과시험 보는 날이었는데 진심 시험보기 직전까지 벼락치기 해서 갠신히 합격했다. 뭐 그런 얘기들을 했다. 그리고 내가 하는 행동들이 ADHD의 특징 중 하나라는 얘기와 좋아지고 있는 상황은 맞다는 말을 해주셨다. 그렇지만 오늘도 약 동일하게 처방해주시겠지.. 별로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어제는 처방이 달랐다. 약을 추가한다고 하셨다. 무슨 약이라고 이름을 말해주셨는데 기억이 안 난다. 하늘색의 이쁜 색 약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잘 하고 있다고 응원만 해주시던 쌤이 나한테 미션을 주셨다. 하루에 10분 정도 집중해서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그걸 시행해보라고 했다. 예를 들면 오늘 오후 퇴근하면 빨래해야지 이런 두루뭉술한 계획 말고, 오늘 오후 7시에 빨래를 돌려야지 생각하고 그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라고 했다. ADHD 특성 상 사실 계획을 했다가도 충동적으로 안 하거나 다른 걸로 계획을 변경하거나 그럴 수 있으니 계획을 지키는 것 자체에 연연하지는 말라고 하셨던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집중하고 수행하는 걸 반복 훈련 하며 전두엽을 활성화 시키라는 것 같았다.

집중하는 10분은 아침이든 저녁이든 상관없다고 하셨다. 저녁에 10분 집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늘 하루를 복기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내가 오늘 뫄뫄를 못 했네 하면서 자괴감에 빠지지는 말라고 했다. ADHD가 그렇지 뭐... 하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모든 걸 ADHD 탓으로 돌리라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오늘의 ADHD 지수 같은 걸 기록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ADHD 지수 기록 괜찮은데? 싶어서 나 혼자만의 ADHD 지수 기록표 같은 걸 만들어볼 참이다.

원래 생각한 오늘 계획이 블로그에 이 글을 쓰는 건 아니었지만 계획을 바꿨다. 블로그에 글 쓰는 게 계획이었다고 치고 오늘 계획은 완료다!

앞으로도 ADHD와 함께 성장하는 나를 글로 꾸준히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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